나도한마디

  • 커뮤니티
  • 나도한마디
  • 본 사이트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을 준수합니다.
  • 회원은 공공질서나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내용과 타인의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물에 대하여는 등록할 수 없으며, 만일 이와 같 은 내용의 게시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회원 본인에게 있습니다.
  •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주민번호, 휴대폰번호, 집주소, 혈액형, 직업 등의 게시나 등록을 금지합니다.

제목

운인 송 홍선생 훈장상신
작성자최원일 작성일2009/03/03 12:25 조회수: 2,112

운인 송 홍선생 훈장상신을 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신 운인 송 홍 (雲人 宋 鴻) 선생의 훈장을 뒤늦게 정부에 상신 했습니다.  이 일이 너무늦게 이루어져 죄송한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저는 그분의 며느리인 외할머니와 친손녀인 어머니로 부터 광주학생운동과 운인선생에 대해 평소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서중1학년 (통합 39회)때 '이름없는 별들' 촬영이 있었고 그때 그분 역을 맡았던 고 최남현님을 제어머니가 직접만나 점심을 대접하며 할아버지의 평소 모습을 전해 연기에 도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또 1967년 학생탑 앞에 흉상을 제작할때도 제 어머니가 광주에 몇차례 내려가 얼굴모습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제어머니는 고집이 쎄서 생전에 그분의 유공을 정부에 알려 훈장을 상신하는 게 어떻냐 권했더니 돌아가신 할아버지 덕보는 못난 후손이 되기 싫다며 거절하시더군요. 당시는 저도 그 뜻에 동조했기에 더이상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제생각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또 어머니가 남기신 그분의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저마져 알리지 않고 더 시간이 지난다면 어떻게 될가?

그분의 나라사랑하는 뜨거운 열정과 마음이 그대로 묻히는 것 아닌가 ? 이런생각이 들어 더이상 주저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몇차례 국가보훈처를 찾은 끝에 지난 2월중에 모든자료를 정리하여 훈장상신을 마무리 했습니다.

결과는 기다려 봐야겠지만 그분의 사후 60주년이 되는 올해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80주년 행사때  그분의 훈장을 학생탑 앞에 받칠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글은 훈장상신과 관련된 내용과 기자인 제가 평소 그분에 대해 쓴글입니다. 참고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운인 송 홍 선생 훈장상신을 하며

지난번 제가 올린 글 ‘운인 송 홍 선생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해 읽으신 분들은 기억 나실 겁니다.
그동안 많이 생각했지요. 그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절 포함해 몇  안 되는데 이대로 묵혀야 되느냐 고민했죠.

그사이 인터넷이나 제가 관련한 잡지같은 곳에 몇 번 그분에 대해 쓰긴 했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분에 대해 잘아는 제가 할수 있을때 이를 널리 알려 많은분들이 접하도록 하는것이 그분의 나라사랑 정신과 마음에 부합하는후손의 할일이란 생각을 갖고 이것저것 살폈죠.

제가 갖고 있는 자료 다 챙겨 국가보훈처에 몇 번 발걸음 한 끝에  서류접수 시켰습니다. 독립유공자 훈장 상신했고 관련 자료는 추후 그분이 재직했던 광주일고나 관련단체에 넘겨 잘 보존하고 학생들에게 학생탑 앞에 계시며 매일 여러분을 지켜보시는 운인 선생은 이런 분이셨다고 알릴 생각입니다.

훈장상신과 관련 제가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이유서와 공적조서를 여기 소개합니다.




                          독립유공자 훈장상신 내용


     유공자 성명 : 宋 鴻

     생년월일    : 1872. 9. 7.         사망월일 : 1949 . 6. 18.

     유공사유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민족교육위해 평생을 바친 분으로 광주고보 재직중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민족혼을 고취하고 항일정신을 일깨워 학생독립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함.

     훈장상신 이유 : 유공자의 친손녀인 宋 貞子 (1995년 작고, 신청인의 어머니)는 생전에 할아버지 유공 팔아 덕 보는 못난 자손이 되기 싫다며 할아버지의 훈장상신을 원치 않았슴. 그분의 손녀 사망한지 14년이나 됐고 가문은 절손돼 (양자 두었으나 소식 끊긴지도 오래 됐슴) 유공자 사후 60년이 됐는데도 누구하나 챙기는 이가 없는 실정임.

  특히 올해는 광주학생운동발발 80주년이 되며 유공자 사후 6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로 오는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행사 때 그분의 훈장을 광주학생운동 기념탑 앞에 받치고 싶습니다.

  신청자인 저는 유공자의 외증손이란 관계 내세워 추호도 보상받을 생각 없고 그분이 재직했던 광주일고 또는 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단체에 유공증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끝내고 싶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제가 챙길 수 있는 자료 첨부하여 훈장을 상신하오니 적극검토 하시어 올 11월 3일 제 80주년 광주학생운동 기념행사를 더욱 빛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국가보훈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2009.     2.     .


             외증조부의 훈장을 상신하며      신청인           (인)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에 작성한 공적개요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민족교육에 평생을 바쳤슴. 광주고보 선생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항일정신을 일깨워 그것이 학생운동에 직접 영향을 주었슴.

 을사보호조약 체결때는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하다 일본헌병대에 끌려가 10여일간 옥고를 치름. 당시 상황은 유고집에 한시로 기록돼 있슴.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아들에게 전달케 했으나 중도에 발각돼 헌병대의 체포령이 떨어져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일제가 문화정책을 펴 귀국후 교직에 몸담고 학생들을 가르침.


                                           함께 제출한 서류

  *독립유공자 훈장상신을 하며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 (국가보훈처 양식)

 *독립유공자 평생이력서 (      ,,        )

 *본인 자필 이력서

 *1930년 2월 17일 동아일보 기사

 *1930년 2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선생의 행적 보도한 신문-잡지 자료 10여종

 *雲人公 行狀 자료

 *애국지사 雲人公 宋 鴻선생 墓表 등

 



                                먼저 쓴 관련 글


11월 3일은 학생의 날

11월3일 이 날은 79년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날.

일제 식민정책에 항거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전국으로 확신돼 3.1독립만세 사건후 꼭10년만에

일제의 간담을 써늘케 하고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린

위대한 민족운동이었고

이 나라 학생운동의 뿌리가 되는 대단한 사건이었죠.

일반신문이나 포털사이트엔 안 났지만

연합뉴스에 보니 광주발로

어제 광주와 전남지역 학생 300여명이

금남로 일대서 학생사건 나던 당시를 재현하는

거리퍼레이드를 했다는 보도가 있네요.

금남공원서 노래, 댄스, 마술등 장기자랑과

당시를 묘사한 상황극 공연등 다양한 행사를 펼치고

학생운동 기념탑이 있는 광주제일고까지 행진했다는군요.

제가 왜 이 얘기를 장황하게 소개하느냐 면

학생사건과 전 각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죠.

전 그 학교를 다녔고

학생탑앞엔 제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오늘도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그 땅과 학생탑을 지키고 계시죠.

학생탑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 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초대 대통령이신 이승만박사의 친필글씨가 새겨져 있죠.

중고시절 교문을 드나 들 때마다  읽었기 땜에

50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그말을 기억하고있죠.

과거 독재정권때는 학생들의 항거를 막는 차원에서

학생의 날을 의식적으로 폄하하고 푸대접했지만

민주화가 성숙한 오늘에도 한 지역만의

단촐한 행사로 그치는것 같아 몹시 안타갑습니다.

젊은 학도는 겨례의 희망이며 이 나라의 보배인데

과외와 입시에 찌들어 그들의 기상을 펼수가 없으니

이것도 학생들을 잘 돌보지 못하는 한 이유가 아닐는지?

학생운동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학생운동'검색해 보세요.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학생들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제 외증조부님 운인 송 홍 선생

                                        겨레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



11월 3일은 학생의 날.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다.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지 3개월뒤인 1930년 2월 당시 민족신문으로 꼽히던 조선-동아 두신문이 다같이 한 조선인 사직교사를 비중있게 기사화했다.

내용은 광주고보 교사인 운인(雲人) 송 홍(宋 鴻)선생이 병이라 칭하고 한시 한수를 남긴 채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것.

도대체 지방에 있는 한 학교의 교사에 불과한 그분이 어떤 인물이기에 두신문이 얼굴사진까지 넣고 2단크기로 비중있게 다루었는가. 그가 남긴 시를 보자.


일찌기 내가 교육혁신을 부르짖어          敎育吾曾叫革新

한마음으로 22년을 보냈는데                  一心二十二年春

오늘 아침 제군들과 이별하게 되니        今朝設與諸君別

강호에 묻히게 되는 늙고                         無負江湖老病人
병든이를  저버리지 말라


지금부터 50년전인 1958년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이름없는 별들'을 본 60대이상 어르신들은 기억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영화에서 원로배우 고 최남현씨가 송 홍 선생역을 맡았다.

강제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말을 못쓰게 하고 일본식 교육만 시키던 당시 교육현장에서 운인 선생은 학생  두명을 교실 앞-뒷문에 파수꾼처럼 세우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들의 동정을 살피면서 은밀하게 우리말로 민족교육을 시키곤 했다.

임진왜란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 전국에서 들고 일어난 승병과 의병대장들의 활동을 비롯 일본제국주의 동향과 국제정세 등 이른바 민적혼을 고취 시키는 불량교육(?)을 꾸준히 시켰다.

선생의 나라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열정이 학생들에게 계승돼 광주 - 나주간 통학열차 안에서 발생한 일인 학생의 조선여학생 희롱사건을 계기로 광주지역 학생들의 쌓인 울분이 폭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전국 각처로 확산된 것이다.

학생사건이후 투옥됐던 제자들이 실형를 선고 받고 수감되던 날, 그동안 온갖 핍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던 선생은 비통한 마음을 담은 한시 한수를 남기고 교직을 떠나 칩거하고 만다.

광주시 서동 고택을 울분당 (鬱憤堂) 이라 이름짓고 그곳에서 지인들과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을 만나고 학문을 익히며 소일 했다.

그로 부터 15년후 해방된 조국의 교육현장에 다시 나서 광주고보 (현 광주제일고)와 광주의대 (현 전남대 의대)에서  마음놓고 후학을 가르치다 1949년 7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운인 선생의 외증손자가 되는 최 영일씨 (66, 경기도 고양시 거주) 는 어릴적 외할머니 (선생의 큰 며느리, 70년대 작고)와 어머니 (송 정자, 선생의 친손녀 95년 작고)를 통해 그분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들려준다.

그분은 꼭 한복에 두루마기만 입었고 일본말을 쓴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한번은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조선인 관리가 집에 찾아와서 일본말로 말을 꺼내자 "이 사람아 자넨 어느나라 사람인가, 대지 못하게 " 우리집에는 왜놈말 알아듣는 사람 없으니 딴데 가서 물어 보라"고 호통 쳐서 쫒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분의 성품을 알수 있는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고결하고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사셨다. 한문에 조예가 깊어 雲人散稿, 금강산기행금고 등 여러 책을 저술했다.

단발령 때와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는 수차에 걸쳐 고종황제께 상소를 올려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수많은 애국자들과 저명인사들 가운데 일제의 압력과 회유로 인해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굴복한 분들이 많아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런데 선생은 일제 패망 때까지 음으로 양으로 많은 회유와 고통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않고 고결한 인품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 더 돋보이고 지금까지도 호남유림의 대표적 인물로 또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67년 학생의 날에 후학과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흉상을 건립,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학생탑 앞에 가면 그분을 만날수 있다.

그분의 친손녀인 송 정자씨는 생전에 "선생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행동,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등을 국가보훈처에 알려 훈장추서를 해야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요청에 "할아버지 팔아서 덕 보는  못난 후손이 되고싶지 않다"며 훈장상신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학생운동이 난지 올해로  80년, 선생이 돌아가신지 60년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무관의 애국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민족 혼이 사라져 가고 도덕과 정의가 피폐해 가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비록 늦긴 했지만 선생의 공적을 되 새기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뜻을 다시 헤아리는 의미에서라도 훈장을 상신하고 , 국가는 그분의 공적을 확인해 훈장을 추서하는것이 타당할것 같다.

덧글 ()


연번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파일
150 껴안아야 할 다문화가족 - 유영식(54회) 연세직업전문학교 .. (0) 일고지기 2009/05/08 1,851  
149 '개미와 베짱이'에서의 가치관 변화- 정용기(52회) 전남대 경.. (0) 일고지기 2009/04/30 2,322  
148 [의료칼럼]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과 대비 : 허정(45회, 에덴.. (0) 일고지기 2009/04/30 2,086  
147 광주 World-OKTA대회 잘 활용해야-김재기(59회,전남대 정치외교.. (0) 일고지기 2009/04/27 2,109  
146 무등경기장, 시민의 품으로 - 문 인(52회, 광주시 자치행정국.. (0) 일고지기 2009/04/22 2,068  
145 박현주(52회) 미래에셋 회장 200억 배당금 포기 (0) 일고지기 2009/04/13 2,109  
144 KIA 내야진은 광주일고 동문회 (0) 일고지기 2009/04/08 1,895 11.jpg 다운로드
143 경기도교육감후보 김상곤을 격려하면서 (1) 윤영준 2009/04/07 1,427  
142 ‘하계 U대회’ 세계속의 1등 광주에서 - 지남철(38회,장기기.. (0) 일고지기 2009/03/20 1,927  
141 로스쿨제도 원안대로 시행하자 - 노영대(50회) 광주지방변호.. (0) 일고지기 2009/03/16 1,956  
140 희망의 큰 불길 ‘얼굴 없는 기부’ - 송광운(48회) 광주 북.. (0) 일고지기 2009/03/09 1,962  
139 U대회 유치단에 아낌없는 격려를 - 김용억(47회) 대한결핵협.. (0) 일고지기 2009/03/04 1,863  
138 현재 보고 있는 게시글운인 송 홍선생 훈장상신 (0) 최원일 2009/03/03 2,112  
137 '광주학생독립운동-타오르는 횃불' 출간 (0) 일고지기 2009/03/03 2,135  
136 광주 시민의 역량 보여주자 - 허정(45회) 광주의사회 회장 (0) 일고지기 2009/03/03 1,874  
135 상임이사회와 정기총회에 관련된 언론 보도 (0) 일고지기 2009/03/02 1,696 090302.jpg 다운로드

맨처음이전 5페이지678910다음 5페이지마지막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