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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일 '학생의 날'을 다시 생각한다
작성자최원일 작성일2009/11/03 00:12 조회수: 1,209

           *지난 3월3일 이난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지주이신 운인 송홍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훈장을 국가에 상신했다는 글을 올린바 있습니다. 그에대한 후신이 필요할 시점이기에 다시 올립니다.


선열들의 나라사랑과 고귀한 희생정신 어디서 찾나?


 11월3일, 이 날은 지금으로부터 만 80년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3.1독립만세 사건후 꼭10년만에 터진 대사건이었다. 일제 식민정책에 항거하여 먼저 광주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 기세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됐다.


일제의 간담을 써늘케 하고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린 위대한 민족운동이었고  이 나라 학생운동의 뿌리가 되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잊지못할  이러한 대사건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잊혀져 이제는 학생운동의 발상지인 광주제일고 (광주고보)와 관계자들 및 광주광역시 일원만의 조촐한 기념식과 기념행사로 끝나는 감이 있어 안타깝다.


학생의 날 기념식이나 행사도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반신문이나 포털사이트가 별로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다. 이래서는 않된다.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민족혼을 깨우쳐  주고 선열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의무가 아닐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당연한 의무를 저버리고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건 큰 문제다. 시급히 고쳐야만 어른된 도리를 다하는것이라 본다.


 


저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심이 높다.  학생운동과  각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가 된 그 학교를 다녔다. 학생독립운동의 상징인  학생탑앞엔 제 외증조부께서 오늘도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그 땅과 학생탑을 지키고 계신다.


학생탑 전면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 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박사의 친필글씨가 새겨져 있다. 대통령이 될때까지 평생 독립운동에 몸받치신 대통령이 큰 관심을 갖고 가꿔주신 학생탑에 스며 있는 선열들의 고귀한 뜻과 희생정신을 오늘에  되 살릴 수는 없는 것인가?


 


중고시절 교문을 드나 들 때마다  읽고 느낀 게 있어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말을 잊지않고 기억하고있다.


과거 독재정권때는 정치권에 대한 젊은 학생들의 저항을 비켜 가자는 얄팍한  생각에서 학생의 날을 의식적으로 폄하하고 푸대접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민주화가 성숙한 오늘에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거룩한 정신이 한 지역만의 단촐한 행사로 그치는것 같아 몹시 안타깝다.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운인 송 홍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과 떼놓을수 없는 분이 제 외증조부님이신 운인(雲人) 송 홍(宋 鴻) 선생이다. 학생의 날을 맞아 그분의  행적과 그분이 학생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많은 분들께 알려 드리는 게 후손된 도리라 생각돼 이글을 쓴다.







 


선생은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민족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당시 광주고보 교사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항일정신을 일깨워 그것이 학생운동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을사보호늑약 체결때는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하다 일본헌병대에 끌려가 10여일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상황은 그분의 유고집에 한시로 기록돼 있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아들에게 전달케 했으나 중도에 발각돼 헌병대의 체포령이 떨어져 미국으로 망명했다. 일제가 문화정책을 펴자  귀국하여  교직에 몸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학생독립운동 사건후 사랑하는 제자들이 투옥돼 실형을받자  정든학교를 떠나고 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지 3개월뒤인 1930년 2월 당시 민족신문으로 꼽히던 조선-동아 두신문이 다같이 한 조선인 사직교사를 비중있게 기사화했다.


 내용은 광주고보 교사인 운인 송 홍 선생이 병이라 칭하고 한시 한수를 남긴 채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것.


 강제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말을 못쓰게 하고 일본식 교육만 시키던 당시 교육현장에서 그분은 학생  두명을 교실 앞-뒷문에 파수꾼처럼 세우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들의 동정을 살피면서 은밀하게 우리말로 민족교육을 시키곤 했다.


 


임진왜란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 전국에서 들고 일어난 승병과 의병대장들의 활동을 비롯 일본제국주의 동향과 국제정세 등 이른바 민적혼을 고취 시키는 불량교육(?)을 꾸준히 시켰다.


 그분의 나라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열정이 학생들에게 계승돼 광주 - 나주간 통학열차 안에서 발생한 일인 학생의 조선여학생 희롱사건을 계기로 광주지역 학생들의 쌓인 울분이 폭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전국 각처로 확산된 것이다.


 


학생사건이후 투옥됐던 제자들이 실형를 선고 받고 수감되던 날, 그동안 온갖 핍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던 선생은 비통한 마음을 담은 한시 한수를 남기고 교직을 떠나 칩거하고 만다.


 


 그로 부터 15년후 해방된 조국의 교육현장에 다시 나서 광주고보 (현 광주제일고)와 광주의대 (현 전남대 의대)에서  마음놓고 후학을 가르치다 1949년 7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저는 어릴적 선생의 며느리인 외할머머와 친손녀인 어머니를 통해 그분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분은 꼭 한복에 두루마기만 입었고 일본말을 쓴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한번은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조선인 관리가 집에 찾아와서 일본말로 말을 꺼내자 "이 사람아 자넨 어느나라 사람인가, 대지 못하게 " 우리집에는 왜놈말 알아듣는 사람 없으니 딴데 가서 물어 보라"고 호통 쳐서 쫒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분의 성품을 알수 있는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고결하고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사셨다. 한문에 조예가 깊어 雲人散稿, 금강산기행금고 등 여러 책을 저술했다.


 단발령 때와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는 수차에 걸쳐 고종황제께 상소를 올려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수많은 애국자들과 저명인사들 가운데 일제의 압력과 회유로 인해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굴복한 분들이 많아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런데 선생은 일제 패망 때까지 음으로 양으로 많은 회유와 고통을 받았지만 이에 굴하지않고 고결한 인품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 더 돋보이고 지금까지도 호남지역 유림의 대표적 인물로 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67년 11월 3일 학생의 날에 후학과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흉상을 건립,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학생탑 앞에 가면 그분을 만날수 있다. 또 1986년엔 선영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우산리에서 묘역단장과 함께  묘비제막식을 갖고 그분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친손녀는 생전에 "선생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행동,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등을 국가보훈처에 알려 훈장추서를 해야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요청에 "할아버지 팔아서 덕 보는  못난 후손이 되고싶지 않다"며 훈장상신을 거절했다.


 이런 연유로 학생독립운동이 난지 80년이 지났고 선생이 작고한지 60년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무관의 애국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민족 혼이 사라져 가고 도덕과 정의가 피폐해 가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비록 늦긴 했지만 선생의 공적을 되 새기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뜻을 다시 헤아리는 의미에서라도 훈장을 상신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외증손자인 제가 선생이 돌아가신지 60주년이 되는 금년초 그일을 추진했다.


학생운동 80주년과 선생 작고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올해 11월3일 학생의 날엔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을 그분 흉상앞에 드려 그분의 나라사랑하는 깊은 마음을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1930년 2월에 보도한 조선-동아일보 기사와 광복후 여러 신문과 잡지에 나온 기사를 비롯 67년 흉상제막 및 묘비제막식 관련 기사 10여건등을 첨부한  공적조서를 작성하여 국가보훈처에 훈장상신한 것이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가? 국가보훈처에서 '활동내용과 수형사실에 대한 객관적 입증자료 미비'로 훈장을 줄 수 없다며 자료를 더 보완해달라는 통보가 왔다.


 


그분께 직접 민족혼을 전수받고 일제에 대한 울분을 참을 길 없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뛰어 들어  감옥살이를 한 제자들과 그분의 행적을 너무 잘아는 광주지역 유지들이 한마음으로 공적을 기려 학생탑앞에 흉상을 모시고 또 선영에 묘비를 제막해 그분의 숭고한 마음과 뜻을 기리는것 보다 더큰 증빙이 어디 있겠는가?


국가보훈처는 유족의 자료가 미비하다고 더이상 증빙타령하지말고 직접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당사자와 광주지역 유지들을 만나 실상을 챙겨보길 권한다. 유족의 자료를 참고하여 전문위원이나 보훈처 당사자들이 직접 조사하고 확인하여 공적을 세밀히 심사하여 적절한 판정을 하는 것이 국록을 먹는 사람들의 당연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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