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이날은 80년 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3ㆍ1 독립만세 후 10년 만에 터진 이 사건은 일제 식민정책에 항거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일어났고 그 기세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됐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세계 만방에 우리 기상을 널리 알린 큰 사건이 점차 잊혀져 이제는 운동 발상지인 광주제일고와 관계자들, 광주시 일원만의 조촐한 기념식과 행사로 끝나는 감이 있어 안타깝다.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떼어놓을 수 없는 분이 필자의 외증조부이신 운인(雲人) 송홍(宋鴻) 선생이다. 학생의 날을 맞아 그분 행적과 학생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많은 분께 알려 드리는 게 도리라 생각돼 이 글을 쓴다.
선생은 당시 광주고보 교사로 일제 감시를 피해가며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항일정신을 일깨워 그것이 학생운동에 직접 영향을 주는 등 민족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을사늑약 체결 때는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열흘 이상 옥고를 치렀고 3ㆍ1운동 때는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널리 알리려 했으나 배포 직전 발각돼 미국으로 망명했다. 일제가 문화정책을 펴자 귀국해 교직에 몸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독립투쟁에 뛰어든 사랑하는 제자들이 실형선고를 받자 충격을 받아 정든 학교를 떠나고 만다. 선생이 교직을 떠난 사실은 1930년 2월 조선ㆍ동아 두 신문이 다같이 비중 있게 기사화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그분의 마음과 열정이 학생들에게 계승돼 광주~나주 간 통학열차 안에서 발생한 일본인 학생의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의 울분이 폭발해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1967년 11월 3일 학생의 날에 후학과 제자들이 뜻을 모아 모교 교정에 흉상을 건립했고, 1986년엔 선영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우산리 묘역단장과 함께 묘비 제막식을 하고 그분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그분에겐 국가가 주는 훈장이 없다.
민족혼이 사라지고 도덕과 정의가 피폐해 가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비록 늦긴 했지만 선생의 훈장을 상신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 외증손자인 내가 올해 초 일을 추진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가? 국가보훈처로부터`활동 내용과 수형 사실에 대한 객관적 입증 자료 미비`로 훈장을 줄 수 없다며 자료를 더 보완해 달라는 통보가 왔다.
그분께 직접 민족혼을 전수받고 일제에 대한 울분을 참을 길 없어 독립투쟁에 뛰어들어 감옥살이를 한 제자들과 그분 행적을 너무도 잘아는 광주 지역 유지들이 한마음으로 공적을 기려 학생탑 앞에 흉상을 모시고, 또 묘비를 제막해 그분의 숭고한 마음과 뜻을 기리는 것보다 더 큰 증빙이 어디 있겠는가?
국가보훈처의 성의 있는 재심사가 빨리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최원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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