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동창회 장학금 모금 책임자(?)로서 몇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시간을 쏟고 기탁해준 동문들에게는 빚진자된 김상형 친구의 동창회에 대한 애정에 깊은 존경을 드리며, '홈피 의견 수렴'에 썻던 1,2에 연이어 3을 써봅니다. 기관장을 지냇고 예순 넘은 나이에 봉사의 이름이 붙더라도 손 벌리는 일이 사회 통념상 쉽지 않을진데, 그만큼 더 결실이 아름답기를 확신하고 같은 수고를 하신 모든 분들께 고개를 숙입니다. 오늘은 장학금을 받는 후배들의 마음과 가치관에 대해 적어 보도록하겠읍니다.(이 글도 상형이 친구와 찻속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위해 제 집안 어른이신 한경직 목사님의 장학금에 대한 사실을 적어 보겠읍니다.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에서 남강,고당 선생님께 교육받고 1925년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스승이신 방위량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에 관한 일들이 준비되었는데 대학졸업도 아르바이트로 한지라 여비가 없어 남강 이승훈 스승님을 찾아 말씀을 드렷더니 소개 편지 두통을 써주셨읍니다. 처음 K선생을 찾았는데 바로 거절 당하고,윤치호 선생님을 뵙자 쾌히 100원(당시 미국까지 선임)을 주시면서 "공부가 끝나면 꼭 한국으로 돌아와서 조국을 위해 일해야 하오. 이돈은 후에 꼭 갚겠다고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꼭 갚기를 원한다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같은 뜻으로 도와 주면 될것이오."라 하셨다. 훗날 윤치호 선생님 아들인 윤영선님(농림장관)께 100만원을 전해 드렸는데, 안 받으려 하셔서 좋은일 하는데에 보내드리도록 하시고 오신이야기 까지를 전해 들었읍니다 장학금을 기탁하신 분들은 윤치호 선생님과 같은 조국과 모교를 위한 마음 이실 진데, 받는 후배들의 마음에 고향과 모교사랑이 숨쉬기를 기대하며 더 큰 결실 있도록 정신적 배려와 시간을 내어 선배들의 경험을 나누어 주는 일도 시작해야하겠읍니다. 일고인의 맥과 문화를 품고 꿈을 갖은 후배들의 삶이 향기로워지는데 장학금을 비롯한 이 모든 일들이 한 부분을 담당할 것이라 확신하며, 나눔이 있는 사람은 행복으로 살고 있음을 생각하며 세번째 글을 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