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47회)의 관풍(觀風)> ‘피끓는 학생’‘오직 바른 길’精神 잘 계승되고 있나
지난 11월 3일은 92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었다. 이날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장에서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동지회, 기념사업위원회 등 관련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치러졌다. 코로나19 때문에 49명만 참석해 아쉬웠지만 김부겸 총리의 영상메시지가 전달되고 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공연도 선보여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춰 진행됐다. 전국의 여러 헉교에서도 교육청이나 전교조, 또는 학생회 주도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92주년 기념식, 코로나19로 49명만 참석하여 치러져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우리의 개천절(음력 10월 3일)과 일본의 명치절(명치왕이 태어난 날)이 겹친 날에 광주역 광장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수 백명이 충돌하면서 시작됐다. 이날 오후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벌였고, 12일에는 지역 청년단체의 지도를 받아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등이 담긴 유인물을 뿌리며 보다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조선총독부의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11월에는 전남지역에서, 12월에는 서울 학셍들이, 1930년 1월 이후에는 전국은 물론 중국 등 나라 밖에서까지 320개 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독립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단군 이래 처음으로 광주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독립의 염원이 들불처럼 번져 전국의 10대~20대 초반 남녀 청년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의거(義擧)였다. 둘째, 당시 적은 학생 수에도 불구하고 초·중·전문학교 학생까지 수만명이 참여하여 수천명이 처벌받고 구속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학생독립운동 이후 1930년대와 1945년 해방이 되기 직전까지도 그 정신이 전국 곳곳에 이어져 내려와 지역단위로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넷째, 11·3 학생독립운동 참여자들이 옥고(獄苦)를 치른 이후에도 농민·노동자 단체에 뛰어들어 지도자로 활동했고, 중국으로 떠나 독립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적 에너지가 되었다. 다섯째, 대한민국 ‘학생운동사(史)’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이다. 1960년 2·28, 3·15, 4·19의거는 물론, 다시 1980년 5·18로 연결되어 6·10항쟁 등 199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기까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화운동으로 민주주의를 완성시키게 되었다.
한국학생운동史의 출발점 – 소프트웨어는 극히 빈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기념일 중 가장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학생들의 정의롭고 뜨거운 정신을 이어가자는 뜻에서 1953년 국회가 ‘학생의 날’로 기념일을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정부는 1973년부터 기념일에서 아예 제외해 버렸다. 1984년 전두환 정부는 이를 부활했으나 이때 ‘학생의 날’은 어린이날 어버이날처럼 통상적인 기념일로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왜곡된 성격의 기념일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때인 2006년 그 명칭이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바꿔져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운동이었음을 강조하게 되었으나 매년 각 광역자치단체에서 돌아가면서 교육부 주관으로 기념식을 갖도록 함으로써 광주광역시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16년만에 한 번씩 기념식을 갖는 ‘잊혀진 기념일’을 재촉하게 되었다.
2018년 대구 2·28기념식에 참석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교육부와 보훈처가 함께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르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이 해부터 3천여명의 시민·학생, 그리고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학생들이 주도하는 형식으로 광주광역시에서 기념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것만으로 정부가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기념사업’이란 역사적 사건을 좀 더 장기적으로, 가시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우리 곁에 두고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다. ‘기억’이란 한 사회집단의 역사를 만들어 주고, 그 위에 문화를 일구어주고, 또한 사회적 연대를 생성하도록 해 주는 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여기에는 기념사업이나 조형물 설치 같은 하드웨어와 문학 미술 뮤지컬 영상 등 예술적 장르와 학술연구 등 소프트웨어가 있다. 그런데 학생독립운동은 하드웨어와 비교해 볼 때 너무 빈약한 소프트웨어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참여학교·참가자 숫자 공식조사 없어 - 일본이 비웃을 판
가장 큰 문제점은 첫째, 발생 92년이 되도록 정부가 전국의 참여학교를 공식적으로 조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에는 조선총독부 비밀문서가 남겨둔 ‘194개 학교 5만4천명 참여’가 전체인 것으로 정리되어 왔다. 그러나 2006년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조사한 결과 320개 학교(참여 인원 미상)로 나타났다.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등이 교과서에 기술된 참여학교를 194개에서 320개로 개정을 요구하면서 9개 교과서 가운데 6개가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걸로는 부족하다. 정부가 참여학교를 조사하여 공식화하여야 한다. 그래야 전국의 학교가 기념행사도 하고 계기수업도 하게 될 것이다. 이대로 놔둔다면 일본이 “한국은 여전히 조선총독부 자료를 가지고 가르치고 있다”고 비웃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군사정부가 학생시위를 두려워하여 기념일까지 없앴다지만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제는 학생들의 정의감, 참여정신을 북돋고 격려하여 선양 계승토록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식으로 ‘기념’을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기념사업 관계자들은 “자치단체가 쥐꼬리만한 예산만 지원해 ‘아직도 독립운동 하듯’ 자원봉사에 의존하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하여 정부가 직접 나서서 예산을 배정하고, 계기수업 정례화와 다큐멘터리 문학 미술 음악 영화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젊은 학생들이 감동할 수 있는 풍부한 예술 장르를 개발하고 정리해야 한다.
둘째, 학생독립운동 유공자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경찰에 검거돼 송치, 즉결, 훈계방면 등을 받은 사람은 모두 5,571명이었고, 이 가운데 학생이 4,565명이었다. 학교에서의 징계까지 포함한다면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생독립운동 유공자는 279명 밖에 안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던 장재성도 사상에 묶여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밖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같은 처지에 있다. 유공자를 선정할 때는 당시로서는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이었음을 감안하여 인정할 필요가 있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굴은 문 대통령 지시 이후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관련학교, 유족, 민간단체들에게 유공자 신청을 맡겨둘 게 아니라 보훈처가 직접 뛰어 발굴해야 한다.
셋째, 기념공간의 전문성이 절실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광주광역시교육청이 관리하고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다. 건물은 그럴듯하지만 여기에서 근무하는 교육청 정규직들은 해마다 바뀌고 있다. 시설을 대표하는 관장도 단 1년을 채우고 정년퇴직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 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회원들은 “개관 이래 18년 동안 16명의 관장이 거쳐갔다”며 “관장들의 정류장”라고 흉보고 있다. 추모관에는 역사적으로 영원히 남을만한 번듯한 기록화 하나 없이 극장 간판 같은 그림 몇점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경륜있는 민간단체에 민간위탁을 하고 공무원들과 함께 근무토록 함으로써 민관이 협동하여 선양·계승·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넷째, 대통령의 방문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이승만(1958년), 윤보선(1960년), 박정희(1964년), 김대중(1999년)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했거나 참배를 하였다. 오늘날 정부는 유은혜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다수 포진된 정부이다. 그러나 이들은 ‘학생운동사’의 뿌리였던 광주학생독립운동 정신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계승하는 데에 소홀히 하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재임 중에 참배를 함으로써 역사적 계승을 이어나가야 한다.
‘학생운동’ 주역 586세대, 오늘날 학생들에게 무엇을 남겼나?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 독립공원에는 높이 11미터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요즘의 기준으로는 아담한 크기이지만 1954년 국민성금으로 지어진 탑이다. 전면에는 눈을 부릅뜨고 행진하는 학생군상(群像)이 부조되어 있다. 바로 그 위에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문귀가 새겨져 있다.
과거에 피끓는 학생이었던 오늘날의 586세대는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과연 ‘피가 끓도록’ 어떤 교훈을 남겼고, ‘바른 길’을 가도록 무슨 지도를 해 주었는지 반문하고 싶다. 교육부와 보훈처도 학생운동 정신이 ‘박제화’ 되지 않도록 기념-기억-콘텐츠 개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김성(시사평론가)
< 2021.11.11. 데일리스포츠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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