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47회)의 관풍(觀風) - ‘피끓는 학생’이었던 독립운동 선열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나?
-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즈음하여
지난 9월 말 북한이 동·서해상으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가운데 한·미·일은 동해상에서 합동군사훈련을 했다. 이를 두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친일국방’을 주장하자 여야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 대표는 “일본 자위대가 독도 근처에서 합동군사훈련을 하고 있다”며 “독도를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의 해상 자위대가 향후 욱일기를 달고 독도 근해에서의 활동이 잦아질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독도보다는 일본과 가까운 거리였다”“한미일 훈련은 문재인 정권때도 여러번 있었다”“친일 국방은 죽창가의 변주곡이자 반미투쟁으로 가는 전주곡이다”“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판에 가만 있으란 말이냐? 조선이 망한 것은 내부에서 갈등 때문이었다”(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고 반격했다. 이 논쟁은 일부 학계에서 역사론논쟁으로 이어졌다.
독도부근 한미일 합동해상훈련, 이재명 “욱일기의 출몰” vs 여당 “반미 ‘죽창가’”
팩트는 한·미·일합동군사훈련이 하와이 등 한반도로부터 먼 곳에서는 있었지만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 부근에서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북한의 도발행위에 대비한 훈련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여야는 결국 ‘친일경계론’과 ‘안보우선협력론’으로 갈라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592년부터 6년간 한반도를 침략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1894년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유도 텐진조약이 빌미가 됐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중국에 병력 파병을 요청했다. 이를 기회로 일본도 중국과의 동등한 파병권을 들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했다. 정작 동학혁명군은 복잡한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전주화약으로 활동을 멈췄으나 한반도는 그들의 격전장이 됐다. 이후 일본은 1894년 경복궁 점령 및 친일 내각 구성, 1895년 을미사변(민비시해), 1902년과 1905년 영일동맹, 1905년 가쓰라-테프트밀약을 통해 한반도 강점을 구체화했고, 1905년 을사늑약과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빼앗아 갔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군수기지 역할로 전후 복구에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었다. 1951년에는 한국이 전쟁에 매달려 참가하지 못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일본은 패전국으로써 배상을 감면받는 한편, 독도가 영유권 포기 도서(島嶼)에 들지 않은 것을 이유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조약문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되어있다. 결국 독도가 그들의 영토로 명기된 것이 아니므로 한국의 부속도서임이 분명한데도 우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한일수교 협상때는 ‘일본이 한국에 두고 온 재산이 많다’며 배상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 설정으로 맞섰다.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뒤인 1965년 한일 청구권협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어디까지의 ‘배상’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빠진 채 어수룩하게 정리되면서 아직까지 갈등요인으로 남게 됐다. 199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노동자 임금 배상문제가 제기되자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은 사죄했으나 전체적으로는 1965년 협약만을 내세우면서 해결을 기피했다.
‘침략과 식민지 범죄행위’ 사죄 외면해온 일본 … 잊어서는 안돼
일본은 35년 강점기간동안 식량·면화·견사의 수탈, 일본농민 한반도 정착, 소작농 양산, 간도(間島)로의 농민 이주, 교육제도 차별화, 독립요구에 대한 탄압, 고문 만연 등 철저히 인권을 무시한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폈다. 아시아 각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서 끊임없는 사죄를 외면하고 있다. 돈 몇푼의 배상으로 해결됐다는 치졸한 ‘사죄정책’을 펴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지난날의 범죄사실을 감추기 위해 교과서 왜곡·축소를 되풀이하고 있다. 하토야마의 말처럼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사죄하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일본의 이런 태도를 잊지 않으면서 일본에 대처해야 한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북한의 도발행위, 미·중 간의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웃 국가와의 관계 개선은 서로 필요하다. 그렇다고 관계 개선만을 목적으로 매달려서는 안된다. 외교적 지혜도 동원해야 한다. 정부여당은 “야당 대표가 일본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높일만큼 국민의 반일정서가 강하므로 일본도 양보하여 진솔하게 사죄하면서 관계를 개선하자”고 카드로 사용해야 한다. 정부가 직접 일본을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치고받는 여야의 논쟁보다 이를 대일 관계 개선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재명 발언, 政爭보다 일본에 대응외교로 활용해야
한일관계는 궁극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장치산업이나 첨단소재산업의 협력, 정치적으로는 동북아의 평화적인 안정 체제 구축을 위한 민주주의 국가 간의 협력, 문화적으로도 공통문화의 향유와 발전 등을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사명은 막중하다.
이러한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양국 정부와 국민이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양보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일본은 내부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군국주의가 자리잡은 20세기 초의 정치체계를 반성해야 한다. 이런 명분으로 침략을 일삼으면서 아시아인들에게 피해를 입힌 과거사를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 유일한 원자폭탄 피해국을 내세울 게 아니라 이미 패배한 전쟁판에 ‘옥쇄’라는 이름으로 최후까지 국민을 희생시킨 지난 권력자들의 악행을 반성해야 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려고만 한 자세를 반성해야 한다.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다가 미래에 또다시 군국주의가 등장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교육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한국도 반성이 필요하다. 지난날 일본의 여러 가지 침략야욕에 대해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얼버무려 온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단죄하지 못한 것도 반성해야 한다. 경제발전 명분때문에 1965년 한일협약처럼 어수룩하게 맺은 외교적 과오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한다. 국민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정권끼리 슬그머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리하려 했던 행위도 반성해야 한다. 이번 ‘친일국방’ 논쟁에서도 외교적으로 활용하는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북한 군사력 억지를 위해서는 일본을 무조건 끌여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편 일부 정치인과 언론도 반성해야 한다.
93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앞두고 반성이 먼저 필요
엿새 뒤인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 93주년 기념일이다. 1929년 10대의 ‘피끓는 학생’들은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고 인생행로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노동자·농민운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독립운동을 해 왔던 그분들은 저승에서 오늘의 논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라고 했던 그 분들을 욕되게 하지 말자.
김 성 (시사평론가)
< 2022.10.27 데일리스포츠한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