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47회)의 관풍(觀風) -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면서 5·18 왜곡은 그대로 놔둘건가
5월에 들어서자 5·18이 다시 생각난다. 적어도 당시를 겪었던 세대에게는 떨쳐버릴 수 없는 기억이다. 국민 사이에도 5·18 해결에 대한 생각이 가지각색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너무 많이 들어서 지긋지긋하다’까지 여러 가지이다.
사라지지 않는 5·18 왜곡과 “북한군 소행”
하지만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일각에서는 SNS를 통한 왜곡이 여전하고, 지도층에 있다는 인사들까지 “북한군 소행”이라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폭도”“내란행위”라고 선전했던 전두환·노태우와 당시 진압군 지휘관들이 대법원에서 거꾸로 ‘내란죄’ 판결을 받은지 26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란집단’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아직도 여전히 ‘신군부’로 표기하고 있는 언론은 과연 반성했다고 할 수 있을까? 1만 명 이상의 계엄군이 투입된 군사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진술에 참여한 군인들이 1천 명을 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5·18은 여전히 과제를 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가운데서 분명히 결정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5·18의 명칭이다.
헌법 전문 수록 어떻게 … 민중항쟁? 민주화운동?
헌법 전문에 5·18을 수록한다면 어떤 명칭으로 수록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가 필요하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이라는 표현만 나와 있다. 여기에 5·18을 추가할 때 ‘5·18정신’으로 할지 ‘5·18민중항쟁’으로 할지 현재처럼 ‘5·18민주화운동’으로 할지를 정해야 한다. 국회의 의결을 거치게 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송선태)의 보고서도 그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명칭은 어떤 사건의 성격을 분명히 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5·18 발생 초기에는 정부와 계엄군에 의해 ‘광주사태’로 불리었고, 1988년 3월 24일 노태우 정부가 조직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그 이후 ‘5·18민주화운동’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학술연구와 국민 사이에는 ‘5·18광주민중항쟁’과 ‘5·18민중항쟁’으로 불리는 것이 보편적이어서 ‘명칭의 2중구조’가 형성되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은 1979년 12·12와 5·18에 가담했던 내란집단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성격이 모호한 이런 명칭 때문에 지난 43년간 ‘북한군 소행’‘쌍방과실’‘양비론’ 등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역사를 왜곡했다.
부마와 6·10은 ‘항쟁’ 되찾고 5·18은 ‘운동’
하여 5·18의 명칭과 성격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
첫째, 정의(定義)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운동에 대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 또는 그런 활동’이라고 했고, 항쟁은 ‘맞서 싸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5·18은 ‘불법적인 공권력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투쟁’이었으므로 ‘맞서 싸움’이 더 적합하다.
둘째, 다른 기념일과의 비교이다. 법률이 정한 비슷한 성격의 다른 국가기념일들과 비교해 보면 4·19혁명기념일과 동학농민혁명기념일에는 ‘혁명’이, 6·10민주항쟁기념일과 부마민주항쟁기념일에는 ‘항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5·18은 2백여 명의 사망·행불자와 4천여 명의 부상·구금자가 발생하여 인명피해가 훨씬 컸다. 또 광주에서 시작돼 오랜 기간동안 전국적으로 국민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운동’보다는 ‘항쟁’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혁명’ 성격 띤 5·18에 ‘운동’ 명칭은 코미디
셋째, 기간의 문제이다. 한 백과사전은 5·18을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었다고 지극히 소극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5·18 직후 법정 투쟁부터 시작하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대학생들과 시민사회단체 시위가 계속되는 과정에 6·10항쟁도 있었다. 또 고소·고발을 지속하여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던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서서 결국 전직 대통령 등 가해자들을 법정에 세우게 했다. 이후 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됨으로써 5·18 과제 중 책임자 처벌과 기념사업 등 일부가 해결되었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 당시에는 정권을 바꾸진 못했으나 국가의 기초가 되는 사회·경제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1960년의 4·19혁명이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내각제를 시행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그런 점에서 5·18도 불법적인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후 17년동안 전 국민이 나섰기 때문에 직선제 개헌, 전직 두 대통령과 내란집단의 처벌, 국가기념일 제정까지 이룩하였으므로 ‘혁명’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타당하다. 프랑스 대혁명도 발생 이후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을 거치기까지 했으나 결국 ‘혁명’으로 불리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이 ‘항쟁’이나 ‘혁명’도 아닌 ‘운동’으로 남아있다는 자체는 ‘코미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도 “민중항쟁”이라고 했다
1998년 8월 대통령 자격으로 광주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5·18은 세계에서 유래없는 초이성적, 초도덕적 투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에서 훌륭하게 싸운 시민들에게 존경과 찬양을 보내고 민주열사들을 마음으로부터 애도하며 유족에게 위로를 보낸다. 세계 각국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희생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광주는 위대하다. 이는 5·18의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코 폭력이 없었고 보복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닌 “광주민중항쟁”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결국 5·18이 보여준 정신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의 열망, 불법적인 공권력에 대한 저항, 공동체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5·18정신을 바탕으로 국내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눔과 배려를 실천하고,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지구촌 공동체를 조성하는 것이 계승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5·18이 ‘폭동’에서 1988년 ‘민주화운동’으로 바뀔 때부터 ‘민중항쟁’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됐으나 정부는 물론 광주광역시마저 “법률로 정해졌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해 왔다. 그러나 비슷한 성격의 항쟁들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고 있는 마당에 더이상 미룰 수는 없다.
‘양비론’ 따지는 에너지 낭비 끝내야
일본정부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쳐왔다. 그 결과 일본국민들은 자기 조상들이 근현대사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우경화되었다. 우리는 그런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국내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서야 될 법한 일인가? 불법적인 공권력에 ‘항쟁’으로 맞서 민주 국가를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5·18을 ‘운동’이라는 소극적 성격으로 얼버무려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 국민도 일본처럼 교육을 잘못 받으면 어처구니없는 북한군 침투설이나 양비론 같은 쓸데없는 주장을 확인한다며 에너지를 계속 낭비할 수 있다. 수백 년 뒤에 우리 후손들이 진실을 찾는다면서 외국의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여 역사의 조각을 꿰맞추는 일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국회, ‘항쟁’ 명칭변경 결의로 논란 끝내야
명칭이 바로 서야 생각과 행동도 바로 선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명칭을 변경해 국민이 ‘또 하나의 과제를 해결했다’는 긍지를 갖도록 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때부터 “5·18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하여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관련단체들도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제는 국회가 지체 없이 명칭변경을 결의하고, 정부도 개정을 서둘러 국론분열을 끝내야 한다. ‘5.18민중항쟁’, 또는 ‘5.18광주민중항쟁’으로.
김 성(시사평론가)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