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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47회)의 관풍(觀風) - 잊혀져가는 제2차 학생독립운동 80주년… 피끓었던 ‘학생정신’을 기억하자
작성자운영자 작성일2023/11/17 10:38 조회수: 82

김성(47회)의 관풍(觀風) - 잊혀져가는 제2차 학생독립운동 80주년… 피끓었던 ‘학생정신’을 기억하자

1943년 5월 9일, 광주의 서중학교 운동장에서는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교장의 훈시가 끝나자마자 한 학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뒤로 돌앗!” 비밀결사 무등회 책임자였던 기영도였다. 학생들은 기영도의 뒤를 따라 거리로 뛰쳐나갔다. 얼추 200여 명은 되어 보였다. 일행은 “한일합병 무효”“내선일체 반대”“학병제도 반”“창씨개명 반대”“일본어사용 반대”“대한독립만세” 등을 외치며 계림동으로 향했다.

일경, “臨政지시” 자백 강요하며 고문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자 학교 옆 누문동 파출소 일본인 순사가 얼이 빠진 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상인은 깜짝 놀라 가게 문을 닫기도 했다. 북정(현재의 북동)을 지날 때에는 일반인도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기영도는 행렬의 앞에서 선배·동지·지도자들이 수감되어 있던 형무소(당시)로 이끌었다. 그들을 구출해야겠다는 생각때문이었다.

행렬이 경양방죽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일본 헌병들이 총을 쏘고 있었다. 행렬은 삽시간에 무너져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기영도 등도 몸을 피해야 했다.

시민들의 대폭적인 호응을 기대했던 주동자들은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낙담했다. 이후 엄청난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가 이튿날 형사 3명에게 붙잡혀 유치장에 끌려갔을 때 이미 수십 명이 잡혀와 있었다. 1차로 80여 명이 검거됐다. 기영도는 극락주재소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두 손을 뒤로하고 수갑을 채운 채 천장에 매다는 비행기고문, 한 겨울밤에 꽁꽁 언 경양방죽에 알몸으로 쳐넣는 고문, 심지어는 쇠꼬챙이를 달궈 허리를 지져대기도 했다.

일본 경찰이 기영도에게 집요하게 캐물었던 것은 임시정부와 내통여부였다. “김구 주석으로부터 받은 지령과 회원 조직을 밝히라”는 거였다. 까무라치기를 여러번,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기영도는 극락주재소뿐만 아니라 화순, 보성, 장성, 고흥, 나주 등으로 옮겨다니며 조사와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다.

일경(日警)의 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중학교 4년 선배이자 친형인 기환도가 서울에서 잡혔고, 윤봉현은 만주 봉천에서 잡혀왔다. 임시정부와 관련성을 캐려고 도쿄와 만주에까지 형사대를 보냈다. 해방 후 이 사건을 ‘제2차 학생독립운동’ ‘무등회 사건’으로 부르게 됐다.

‘독서회’‘무등회’ 등 비밀결사 끊이지 않고 조직

기영도는 1939년 서중학교에 입학했다. 원래 명칭은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였으나 일본의 학교 이름과 맞춘다고 하여 1938년부터 ‘서공립중학교’(서중)로 바꿨다. 그가 신입생일 때 그의 친형인 기환도는 5학년 졸업반이었다. 두 형제의 할아버지는 기삼연(奇參衍) 의병대장으로 조선말 호남지방의 의병을 이끌었다. 하여 기환도는 동생에게 “가문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된다”“어렵고 힘들지라도 나라는 기필코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서중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1929년 선배들의 학생독립운동정신을 이어받자며 ‘서중혼(魂)’을 긍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 여러 비밀조직이 끊이지 않고 만들어졌다. 1935년에 송흥오를 중심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가, 1938년에는 서중독서회가, 1941년 12월에는 독서회를 해체하고 ‘무등회’라는 조직이 결성됐다. 그러나 번번이 일경에 발각되어 많은 학생들이 퇴학당하거나 구속됐다. 1942년 1월 무등회 회원 일부가 투옥된 후에도 5월에 다시 무등회를 재건해 기영도가 총책을 맡았다.

1942년 10월 기영도는 휴학하고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로부터 일제의 미드웨이 패전과 기울어져가는 전황 등 국제정세를 듣고, 다시 만주를 거쳐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주석과 이시영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만났다. 두 분은 광주에서 먼 곳까지 찾아와 준 것을 대견하게 여기면서 “독립의 뜻을 잃지말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했다. 기영도는 돌아오는 길에 평안도 오산고보 박무식, 안주농교의 신길모, 전주북중 김병순 등과 만나서 때가 되면 전국적으로 거사하자는 약속을 했다. 그가 회원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자, 회원들은 독립의 의지를 더욱 다졌다. 1943년 5월 8일 무등회원들은 전국의 학생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600장을 만들어 극비리에 발송했다. 그리고 다음날 앞서와 같은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상 전남일보 1979년 11월 21일자 ‘횃불반세기’요약)

한 달간 맹휴투쟁 … 350명 검거돼

이어 서중학생들은 ‘학병지원 반대’‘창씨제도 반대’‘일어상용 반대’‘징병제도 반대’ 등을 내걸고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 맹휴투쟁은 6월까지 계속됐고, 재학생은 물론 8년 전에 독서회에 참여했던 졸업생들까지 350여 명이 검거됐다. 이 중 183 명이 장기간의 가혹한 취조를 받았으며 80여 명이 검사국에 송치됐다.

기영도는 동료들과 함께 최고 단기 2년 장기 4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여기서 광주에서 거사가 있었던 날을 전후하여 전주북중, 순창농교, 오산고보, 안주농교에서도 항일운동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았다. 옥중에서 이들 학교 대표들과 해후했기 때문이다. 또 형무소 입감 3일만에 형님 기환도가 숨졌다는 것도 알았다. 기환도는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늑골 4개나 부러지는 등 가혹한 폭행으로 숨졌으나 폐결핵으로 병사(病死)처리됐다. 형님과 함께 고문을 받았던 윤봉현은 현장에서 즉사했으나 역시 병사처리됐고 주만우 강한수도 마찬가지였다. 기영도는 해방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풀려났다.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4명, 해방 후 뒤늦은 위령제

억울하게 숨진 네 사람의 희생자들을 위해 1945년 11월 25일 광주시민장 및 광주서중동창회장으로 위령제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사건은 형식적으로는 10명이 실형을, 나금주 등 21명이 오랜 예심을 거쳐 기소유예 처분됐으나 수백 명이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작으로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일제는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가차없이 공산주의자, 불령선인으로 몰아 가혹한 형을 내렸다. 그래 국내 독립운동은 공백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서중학교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체념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선배들이 지켜온 항일정신을 사수해 나가야 한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장기를 훼손하거나 교련교사 책상서랍에 인분 넣어두기, 일본 국가 바꿔부르기 등 사소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1938년부터 시작된 군사훈련도 열심히 했다. 언젠가는 왜놈들과 총검으로 맞서게 될 날이 올 것이므로 이 기회에 군사훈련을 열심히 받아놓아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가혹한 고문으로 수많은 ‘박종철’의사(義士) 나와

한편 1940년대 일제의 학교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계속됐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에서 다혁당이라는 비밀결사가 발각돼 300여 명이 검거되어 주동자 35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5명은 옥사(獄死)했다. 함흥에서도 각 중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철혈단이 1941년 시위행진을 해 95명이 검거되어 37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대구상업학교 학생 20명으로 결성된 태극단도 1943년 5월 발각되어 35명이 검거되고 6명이 재판에 회부됐는데 이 중 3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고보생 1,000여 명도 일제가 중등학교 군사훈련에 대해 편파적으로 심사하자 아리랑을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고 일본인 장교 노다이(乃台) 관사를 습격했다. 이 일로 200여 명이 체포되어 14명이 징역 8개월 등 실형을 받았고, 1명은 출옥한지 2주일만에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밖에 해방의 그날까지 크고 작은 학생항일운동이 계속됐다.

1929년 학생독립운동만 기억 … 1940년대 항일운동도 ‘제2차 학생독립운동’ 명명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1929~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1940년대 학생들의 항일투쟁들도 한데 모아 ‘제2차 학생독립운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2차 독립운동은 규모는 비록 작았으나 사망자가 많아 1차 때와 달리 수많은 ‘박종철’의사(義士)가 나왔다. 10대의 어린 학생들은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징용·징병 등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인권기구나 언론도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을 외쳤던 것이다. 그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내일 11월 3일은 제94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또 제2차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지 80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숨진 학생들이 품었던 그때의 피끓는 ‘학생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
김 성(시사평론가)

< 데일리스포츠한국 2023.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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