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47회)의 관풍(觀風) - 22대 총선, ‘예측불허 국제정세‘에 대처해 나갈 토론 없어도 되나?
2022년 2월 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이 2년을 넘겼다. 전쟁은 우크라이나 국내에 그치지 않고 아프리카로도 확대되고 있다. 수단 내전에서 금광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용병과 우크라이나의 특수부대가 ‘원정전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지루해진 러-우 전쟁, 우리나라에 ‘외교적 불똥’ 튀어
한편 러시아는 한국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설이 나돌자 러시아 외무성 대변인이 한국정부를 강력히 비난한데 이어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혐의로 붙잡아 재판에 회부했다. 과거엔 ‘좋은 사이’였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젠 ‘적대적 관계’가 됐다. 러시아는 한국의 참여 정도에 따라 북한에 군사기술 제공의 수준을 조절하려 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러시아의 첨단 군사기술이 북한으로 이전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전쟁이 지루하게 진행되면서 현 상황에서 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6·25전쟁 발발 1년도 안 된 1951년 7월 10일부터 정전협정을 시작했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전쟁 피로감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무기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 각국의 피로감이 커지면 우크라이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팔 전쟁 확산, 중동特需에 찬물 끼얹을까 걱정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 공격도 대규모 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하마스의 기습공격은 이스라엘과 아랍세계 종주국인 사우디의 수교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거세게 가자지구를 공격하자 이란은 “전 아랍국가의 단결과 이스라엘 응징”을 외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동과 도시 플랜트수출, 원전건설, 전술 무기 수출 등으로 깊은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어 갈등이 확대되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 트럼프는 유세에서 “미국은 억류자 석방을 대가로 이란에 60억 달러를 지급했다”고 말했다. 그 60억 달러 중 일부가 하마스에 흘러갔다는 것이다. 60억 달러는 한국이 압류하고 있던 이란의 석유대금이었다. 하여 한국도 어쩔수 없이 중동의 갈등에 개입되어 있다.
중국과의 관계도 현재는 비관적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최대수출국이었으나 미중갈등이 심해지고, 한미일 안보협력이 강화되면서 수출이 급감했다. 중국도 일본과 한국의 역할을 보아가며 북-중 관계를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약해진 미국’ ‘트럼프 당선 가능성’ - 불안한 미래
미국은 75년 전인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3만 명이 넘는 미국의 청년들을 낯선 이국땅에서 희생시켜가며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았다. 역사상 유일하게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16개국이 참전하도록 했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이러한 안보적 배경을 바탕으로 60년이란 짧은 기간동안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유일하게 성공한 세계 10위권 국가가 됐다. 그런데 세계 최강국 미국이 심상치 않다. 트럼프가 미국 대선 과정에서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동맹’보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정책을 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주한미군 주둔비 3배 인상을 요구하면서 ‘철군’이란 히든카드를 보여 한국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북한의 김정은을 세 차례나 만났고 성과를 내지는 못했으나 “좋은 친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 약속한 방위비를 내지 않고 있는 나토 국가들을 비난하고, 나토 탈퇴 가능성도 없지 않아 국제정세가 뒤집어질 판이다.
설령 바이든이 대통령에 재선된다고 하더라도 허약해진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체질 때문에 ‘미국 우선주의’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 크다. 우리는 내년부터 미국으로부터 덮쳐올 압력에 과연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조선정부, 일본의 再侵만 걱정하고 ‘혁신’ 건의는 외면
한국은 과거에 국제정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국권을 상실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정부는 임진왜란을 겪고서도 이후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데 소홀히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관계가 복원됐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면 많은 일본인들이 통신사 일행에게 구름처럼 몰려와 글을 받기를 원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자신이 지은 시를 가져와 감수받기를 청했다. 일본은 국제전쟁 이후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손들이 에도정부를 이끌면서 정상을 찾았다. 17세기부터는 나가사끼를 중심으로 네덜란드·포르투갈·동남아는 물론 중국과 직교역을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조선의 동래를 거점으로 하는 중계무역에 주로 의존했으나 직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조선의 대일 중계무역은 축소됐다. 1763년 제술관(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동행하는 글재주가 있는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남옥은 대일무역의 부진이 국력의 쇠퇴에 직결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일본의 직교역 정책은 문화도 발전시켰다. 그동안 조선통신사 일행은 외교적 활동 외에 주자학을 일본에 전파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중국의 반(反)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조선의 사신들과 논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 사신들과의 필담집을 곧바로 인쇄하여 나누어 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 사신들의 지적 수준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1763년 통신사 서기로 수행했던 원중거는 “융성하는 일본의 ‘문기’에 걸맞게 우리도 종래의 거만한 태도를 바로잡고 겸손하고 공경한 예로써 대하여야 한다”고 했다. 일행은 강물에서 부엌까지 물을 끌어들이는 수차(水車)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일본이 제공한 선박을 이용하면서 그 규모와 정밀함에 놀라기도 했다. 1748년에 수행했던 군관 홍경해는 “한 일본인이 조선술의 순위가 아란타(네덜란드), 중국, 일본, 조선이라고 했다”고 기술했고, 1763년에는 조선 배가 일본인들에게 비웃음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1719년 막비(장관급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이 쓴 ‘해사견문록’의 발문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 표류하면 그들은 번번이 새로 배를 만들어 돌려보냈는데 그 배의 제도가 아주 절묘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도착하면 우리는 그것을 부수어 그 법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조선 후기에는 제대로 된 배를 만드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원중거가 일본의 조선술을 배우자고 강조하고 나섰으나 조선 국내에서는 이덕무 외에 그의 열정적인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사신들은 귀국 후 선진화된 일본의 경제, 문화, 기술산업 등에 대해 정부에 보고하고 일부의 도입을 건의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일본이 조선에 다시 침략할지 여부에만 관심을 두었을뿐 개혁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박제가 정약용 등 실학파 일부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이다. (박상휘 지음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에서 발췌)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에도 속수무책
국제정세에 관심을 게을리 한 결과로 100년 뒤 한반도는 외국의 파워게임에 휘둘리게 됐다.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아관파천(1896년), 을사늑약(1905년)등이 차례로 진행됐다. 일본은 1902년 영국과 함께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함께 나누어 갖는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 1905년 7월에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국제정세가 이렇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국제정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이처럼 국가가 패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은 국제사회와 관련된 변수가 많아 국제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남북한 간에 분쟁이 일어난다면 6·25전쟁 때처럼 유엔군이 파견될 수 있을까. 한국의 방위산업과 반도체산업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할 정도로 허용 범위를 넘어서 고도성장을 해 ‘제2의 플라자합의(1985년 일본에게 했던)’를 요구받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북-중-러 관계가 강화되어 한-미-일 안보동맹도 요구된다면 한국은 일본과 안보동맹을 맺어야 할까.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미국이 군사적·경제적 부담 때문에 6·25 직전인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 선포때처럼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하겠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예측할 수 없는 국제정세, 국민과 함께 헤쳐 나아가야
외교는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정치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은 이제 가치외교든 실용외교든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 단적으로 정리하자면 가치외교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와만 함께 가겠다는 뜻이고, 실용외교는 국익을 가장 중심에 두고 외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가치외교와 실용외교를 무 자르듯 나누어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커다란 흐름은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은 그동안 개방체제에서 경제성장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제는 자원 전쟁, 반도체 전쟁, 미중 갈등, 한미일-북중러 구도, 인·태전략 구상-중국의 일대일로 정책 등으로 양분된 상황을 맞고 있다. 한국은 18세기 조선통신사의 보고를 소홀히 한 대가로 20세기 초 국가를 잃었다.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다. 정보홍수의 시대, 브레인스토밍 시대, 거버넌스 시대이다. 하여 중의(衆意)를 모아 국민과 함께 파고 높은 국제정세를 헤쳐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22대 총선을 치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양당은 국내문제만 치중할 뿐 국제관계에 대비한 정책토론을 갖지 않고 있다. 필자는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결론을 제시할 수 없다. 국제 환경에 따라 변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편향외교가 아닌 균형외교, 실리외교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김성(시사평론가)
< 2024.03.21 데일리스포츠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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